골프이야기

라면국물 생각에

봄봄9 2010. 9. 21. 10:18


클럽하우스에 들어서니, 로비에 놓인 화분에 활짝 핀 양철쭉이 화사하다.
꽃은 화사하지만 온실에서 나온 꽃이라 강한 봄의 생명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우수가 지났지만 아직 쌀쌀한데, 사람이 만들어 준 온도에 제철인 줄 속아 핀 꽃이 로비를 붉게 물들이고있다.
장돈식 선생이 에세이<빈산엔 노랑 꽃>에서 쓰셨듯이 이른 봄 가장 먼저 피는 꽃은 노랑색이다.
잔설을 뚫고 가장 먼저 피어나는 꽃 복수초가 노랗고, 곧 삼악산이며 금병산을 물들일 생강나무 꽃이 또한 노란 색이다.
생강나무 꽃, 강원 영서 지방에서 동백꽃이라고 부르는 김유정 선생의 소설 제목에도 쓰인 그꽃 다음에 피는 꽃이 진달래, 그후에 철쭉들이 붉게 핀다.
때 이르게 차례를 어기고 핀 붉은 양철쭉이 순서 어긴 샷 처럼 어색하고, 솔트레이크 숏트랙에서 반칙으로 먼저 골인한 서양선수처럼 불쌍해뵌다.

남 1번 홀. 파4.

첫 홀 티 박스에 가보니 재떨이에 담배가 혼자 타고있다.
앞 팀 어느 골퍼가 티샷이 엄청나게 잘 맞았던가,지독하게 나빴나 보다.
흥분한 그 골퍼, 담배 끄는 것을 잊고 갔기에 주인 잃은 담배가 저 홀로 탄다.

2번 홀. 파 5.

잘 맞은 드라이버 샷에 흐믓했는데, 공은 디봇 자리 모래위에 얹혀있다.
고수들은 이런 공도 아무 문제 없이 잘만 치던데, 나는 겁부터 난다.
5센티미터만 덜 나갔어도 디봇 자국은 면할텐데 하수는 운도 안따라주는구나.
불평 가득한 맘으로 아이언 샷 했는데 역시 공은 쪼르르...
원망스런 눈으로 디봇 자국을 보는데,이런! 모래 속에 숨어있던 담배꽁초 하나
비죽이 솟아나왔다.
담배 꽁초를 디봇 자리에 슬쩍 꽂는 사람이 있다더니, 사실이었구나!
주워 갈까 망설이다 그냥 간다. 에이,내가 뭘, 그렇게까지...
5온 한 그린에서 퍼팅 어드레스를 하는데 불현듯 그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예전에 등산객의 산중 취사를 금지하지 않을 때,나는 어느 술 자리에서 설악산어느 골,어느 계곡이 아름다우며

어느 능선 무슨 봉이 좋은데 내가 얼마나 여러번 설악을 올랐는지,얼마나 설악을 사랑하는지를 자랑하고 있었지.
그 때 그친구 쑥스런 표정으로 말했지.
"나도 설악산엘 가보고 싶어서 지난 가을에 처음 갔었는데,중간에 도루 왔어.
올라가다가 무슨 폭포 부근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설겆이 하려는데,물이 너무
맑아 라면 국물을 버릴수가 없었어.
할 수 없이 그걸 다 마셨는데, 배가 출렁대서 더 못 올라가겠드라구.
그래서 그냥 내려왔지."
그냥 두고온 디봇의 꽁초와 그녀석의 라면 국물이 자꾸 머리를 어지럽혀서 그만 3퍼팅을 했다.
성적표에 그린 갈매기가 녀석이 라면국물 먹는 모습으로 보인다.

3번 홀. 파3.

티 박스의 매트 놓인 방향이 왼쪽 그린을 향해 있다.
어드레스하고 보니 아무래도 왼쪽으로 선 것 같다.
오늘 그린은 오른쪽 이니,약간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그런데....공은 너무 오른쪽으로 날아가 벙커에 빠진다.
한탄하는 내게 심사장님이 위로한다.
"골프는 미스가 있기에 재미있는거야."
티 박스 뒤 사슴우리 속 암사슴이 물끄러미 내다본다.
<나두 미스인데...>

4번 홀 . 파4.
나는 항상 짧은 거리 퍼팅이 자신 없다.
긴 거리야 원래 못 넣는 거니까 겁날 것도 없다.
긴장하는 내게 아내가 조언 한다.
"과감히 치세요,자신있게."
과감히 펏 했는데, 이런, 過强했구나!

5번 홀. 파4.

지난 홀 버디 잡은 심사장, 한사코 오너를 사양하신다.
"멀건 받아 버디 잡은 것두 쑥쓰러운데, 오너까지 하라구 하면 부끄럽지!"

7번 홀. 파 3.

106미터, 지난 겨울 어느날 여기서 티샷이 홀컵에 바짝 붙었었지.
일회용 라이터 길이였었지.
집에가서 라이터 길이를 재 봤더니 8센티미터였지.
오늘 또 한번 붙여 봐?
지난 번 샷을 어떻게 했더라?....하며 쳤는데 헤저드 안빠진게 다행이다.
고수는 지난 샷의 잘못된 부분만 기억하고 반성하는데, 하수는 잘친 것만 기억
하고 늘 그러리라 착각한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8번 홀. 파4.

오늘은 벙커에 한번 밖에 안들어간다 했는데,벙커 들어가는 것도 기준 횟수가 있
는지 내 공은 또 벙커를 찾아들어간다.
그런데, 이런,손질 안한 발자국 속으로 들어갔다.
이거 누가 벙커 손질도 안하고 갔어, 툴툴대며 한 벙커샷이 느낌이 좋다.
"나이스 샷!"
"나이스 온!"
정말 온인가? 후다닥 그린으로 뛰어올라보니, 우와, 정말 붙었다!
가볍게 파 세이브하고 다음 홀로 이동하면서 나는 한껏 고무되었다.
"벙커,그거 별거 아니구만, 올리면되지 겁낼 것 없다구!"
자랑하면서 마지막 홀에 티샷 하려는데,
아차! 지난 홀 흥분하다가 벙커 손질을 잊고 왔구나!

19번 홀. 파0

온탕에 들어가 느긋하게 오늘의 플레이를 반추한다.
오늘 갈매기가 세마리나 날아다녔어도 파를 5개나 했으니 그게 어디냐.
갈매기 세마리 잡았으니 오늘은 갈매기살에 소주 한잔 걸칠까?



----달빛받은 박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