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잡어는 없다

봄봄9 2010. 9. 21. 10:28

동해안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국도를 따라가다가

바다를 옆으로 끼고 한적한 포구 마을로 들어서니 허름한 횟집이 바다를 마주보고 엎드려있다.
한 여름엔 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바닷가 모래밭은 눈만 덮여있을 뿐 적막한데,
낮은 파도가 밀려와 모래밭을 두드려 보고는 아무일 없었던 듯 물러가기를 반복한다.

겨울 바닷가 횟집에는 손님도 별로 없어 조용하다.
횟집 방은 온돌이 따끈따끈하고, 예전에는 바닷바람을 막을 벽이 있었을 자리에는
커다란 유리를 끼워놓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마음 따뜻한 벗과 마주앉아 소줏잔 주고 받으니 예가 내 집이로구나.
주문 받는 주인장에게 광어,우럭,도미같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 말고 뭐 좀 다른 것으로 달랬더니

바닷바람에 그을려 거친 얼굴의 그러나 마음 넉넉하게 생긴 주인 아줌마가 내오는 것은 잡고기 회란다.

잡고기라니!
돌아서 나가는 아줌마를 불러세워 고기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이게 회뜨기고요, 이건 코플레기, 요건 놀래미래요."
"이름도 참 재미 있네요.
그냥 잡고기로 분류되는 생선들 이름 좀 적어 주실랍니까?"
실없는 부탁에 아줌마가 씩 웃으며 나가더니 고기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준다.

--회뜨기.코플레기.아귀.청어.놀래미.게르치.홍치(홍치? 꽁치를 잘못 썼나?).
숭어, 참숭어(숭어도 잡고기라니!).......----

이름들도 재미있지만 맛도 생김새도 제각각 독특해서 좋다.
그런데 이들 생선이 잡고기라니!
<雜>을 잠시 생각해 본다.
잡스럽다는 난잡하고 상스럽다는 뜻이요,
잡살뱅이는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것들이 뒤섞인 것을 말하고,
잡다한 것은 이것 저것 자질구레한 것을 말함이니
잡어는 이것 저것 자질구레한 고기란 말인가?
잡놈은 행실이 나쁜 남자고, 잡년은.....
아무리 봐도 이들 맛있는 고기가 <雜>이라는 이름으로 욕먹을 이유는 없구나.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해서, 잘 팔리지 않는다해서,

 아니면 사람들 입맛에 덜 맞는다해서 붙여진 이름이겠으나 ,고기가 들으면 섭섭하기 짝이 없을 이름이 아니겠는가?

먹이사슬에 얽혀 치열한 생존 경쟁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파도 높이 이는 바닷속에서 저마다 자유롭게 살던 고기가,

어쩌다 운이 없어 사람에게 잡혀 안줏거리가 되는 것도 억울한 터에 제 이름 놔두고 잡고기라 불린다.
사람들이야 제 편한대로 회뜨기라 부르던 잡고기라 부르던 간에,

 그 고기의 한살이는 얼마나 치열했을까?
그러니 잡고기들이여.
사람들이 제멋대로 너희들을 잡고기라 부를지언정 너희들은 결코 <雜>일 수 없다.

나그네 사설이 길어지니 마주앉은 벗이 빙그레 웃으며 잔을 권한다.
벗의 얼굴이 발그레한 것을 보니 내 얼굴도 홍시를 닮아 있겠지.
일렁이는 바닷물은 솟아오른 달빛을 흠뻑 받아 금가루 뿌린듯 반짝인다.

---달빛받은 박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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