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970년 봄 산골아이의 하루

봄봄9 2010. 9. 21. 12:11


화창한 토요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십릿길이 아이들에겐 조금도 멀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
간밤에 내린 비로 산천은 물에 헹군 듯 말간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가만히 보고있으면 까닭없는 졸음이 기분 좋게 밀려옵니다.
더 가까이 다가선 산 허리 연두빛 숲 사이사이에는

복숭아랑 개살구꽃이 서투른 아이 그림 그려놓은 듯 제멋에 겨워 흐드러지게 피어있습니다.
그 산비탈 따라 뱀처럼 구불거리는 시골길을 여자애들은 책보자기를 허리에 두르고
남자애들은 어깨에 두르고 셋씩 넷씩 어울려 조잘대며 걷는길이
백리라 한들 지루한 길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길 옆 도랑 가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호드기를 만들어 붑니다.
가는 호드기는 삐익 삑 높은 소리를 내고, 굵은 호드기는 부웅 붕 낮은 소리를 냅니다.
부웅 붕 , 호드기 부는 아이에게 다른 아이가 놀립니다.
"니 호드기 소리는 머 그러니?
꼭, 니 방귀 소리 같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대고, 붕붕대던 아이 얼굴이 발개집니다.
길 섶에 노랗게 꽃 핀 민들레도 대궁을 꺾어 불면,

 배어나오는 하얀 진이 쓴 맛을 내긴 해도 불만한 호드기가 됩니다.

봄 기운 흠뻑 먹은 비탈길 십릿길을 한 달음에 돌아온 아이들은
책 보자기를 툇마루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호미며 괭이를 들고 마을 뒷산 양지바른 산자락으로 모여듭니다.
새끼를 배서 배가 불룩해진 누렁이가 쭈욱 기지개를 켜고는 게으른 몸짓으로 따라나섭니다.
산자락에 붙은 밭에는 털보 영감님이 밭을 갈다가 담배 한대 물고 쉬고 앉았습니다.
순한 눈 껌벅이는 암소도 멍에를 진 채 서서 새김질하며 쉽니다.
암소 배 밑에 송아지가 주둥이 디밀고 젖을 먹습니다.
송아지는 몇 번 젖을 빨다가 어미 젖을 두어번 들이받고 다시 빱니다.
젖 나오는게 시원치 않나봅니다.
어미소는 움찔 움찔 흔들리지만 송아지를 쫓지 않습니다.
털보 영감님이 아이들에게 말을 붙입니다.
"요놈들, 괭이들고 어디 일하러 가니?"
아이들이 입을 모아 노래하듯 대답합니다.
"조오기, 칡 캐 먹으러 가요!"
"요 놈들아 , 요새 칡은 써서 못 먹는다."
아이들은 못 들은척, 조잘대며 산자락에 들어섭니다.
산은, 온통 진달래 세상입니다.

양지 바른 쪽에 칡 줄기가 보이고 아이들은 뿌리를 찾아 괭이질을 합니다.
콧잔등에 땀이 송송 맺히고 손바닥에 물집이 잡혀도 아이들은 보물 캐듯 칡을 캡니다.
아이들 팔뚝보다 굵은 칠뿌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히야! 굵다! 암칡인가보다 .알이 통통하다!"
아이들은 흙 묻은 손으로 이마를 훔치며 칡을 찢어 씹습니다.
달착지근하고 쌉쏘름합니다.
털보 영감님 말씀대로 이미 물이 오른 칡뿌리는 단맛보다 쓴 맛이 강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입 주위가 시커매지도록 칡을 씹습니다.
시커매진 입을 서로 가리키며 까르르 웃어댑니다.

칡 캐먹기가 시들해지면 아이들은 지천으로 흐드러진 진달래를 따 먹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진 않지만 다투어 꽃을 따 먹다가
둘러앉아 꽃쌈을 합니다.
꽃술을 맞 걸어 당기다가, 끊어지면 지는 꽃쌈에 아이들 미간이 좁아집니다.

꽃쌈이 싱거워지면, 아이들은 산을 내려와 밭둑 찔레 덤불밑을 뒤집니다.
땅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찔레 새순은 꺾어서 껍질 벗기고 아작아작 먹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그만입니다.
누가 꺾은 찔레가 더 굵은가 대보기도하고
그맛이 그맛이련만 서로 바꿔 먹기도 합니다.

찔레 덤불 밑을 기웃대던 아이 하나가 갑자가 외칩니다.
"이야! 새 집이다! 일루 와봐!"
아이들이 조심조심 모여 눈을 빛내며 들여다 봅니다.
마른 풀을 엮어서 어른 주먹만하게 만든 새 둥지에는 작은 조약돌만한 새 알 네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흑갈색 반점이 점점이 찍힌 새알을 들여다보는 아이들이 제각각 아는 척 합니다.
"박새 알이다."
"아냐, 찌르레기 알이야."
한 아이가 손을 뻗어 조심스레 만져봅니다.
"야아...따뜻하다, 따뜻해!"
"야! 만지지 마!"
다른 아이가 낮지만 힘준 목소리로 소곤댑니다.
"그러다가 깨지면, 너, 벌 받는다? 울 할머이가 그랬는데, 새알 깨면 벌 받는대!"
새알 만지던 아이가 멈칫, 손을 거두고 무릎 걸음으로 물러앉습니다.
문득, 뻐꾸기 울음 소리가 들립니다.
"뻐꾸기 알인가보다, 가자!"
아이들은 뒷걸음으로 찔레 덤불을 빠져 나옵니다.
갑자기 찔레 맛이 달아난 아이들은 들고 있던 찔레를 버리고 집으로 향합니다.

돌아오는 길가 도랑은 간 밤 비에 물이 불어 졸졸 소리내며 흐릅니다.
도랑가 웅덩이엔 개구리 알이 뭉글뭉글 뭉쳐있습니다.
어린 올챙이도 꼬물꼬물 헤엄칩니다.
아이들은 웅덩이 주위에 둘러서서 들여다 봅니다.
"야, 개구리 알이다."
"아냐, 올챙이 알이다. 저기서 올챙이가 나온다."
아이들은 고무신 벗어 올챙이를 잡아 담아놓고 들여다 봅니다.

마을 어귀 밭둑에는 여자 아이들 서넛이 냉이랑 달래를 캐고 있습니다.
사내 아이들 다가가 바구니를 들여다 봅니다.
무슨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던 사내 아이가 아는 척 합니다.
"에이, 이쑥은 못 먹는 건데에!"
여자 아이 하나가 대뜸 픽! 합니다.
"핏! 니가 뭘 알아? 울 엄마가 이거 먹는 쑥 이랬는데? 알지도 못하는 게!"
머쓱해진 새내녀석, 문득 바구니를 걷어차고는 냅다 달아납니다.
영문 모르는 배 부른 누렁이도 따라 뜁니다.

집에선 엄마가 마루위에 커다란 물통에 더운 물 담아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이를 홀랑 벗겨서 샅샅이 때를 벗깁니다.
"이 녀석아 맨날 흙강아지로 다니니......,까마귀가 사촌이라 하겠다!"
아이는 가릴 것도 없는 아랫도리를 두손으로 감싸고 엄살을 떨면서 싸리 울 밖을 흘낏댑니다.
"아유! 살살 문대애..."
아까 나물 바구니 걷어채인 여자애가 쫓아와서
발가벗은 모습을 들킬것만 같습니다.
길어진 해는 아직도 서산위에 걸터앉아
까닭없이 부끄러운 아이의 엉덩이에 부드러운 볕을 쪼여 줍니다.


----달빛받은 박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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