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4, 그리고 일요일..
시월은 노는 날이 많아서 좋은 달입니다.
1970년...쯤 시월의 어느 학교 안가는 날, 산골 마을의 새벽은 뽀얀 안개 속에서 시작합니다.
안개는 온 마을을 콩물 끼얹은 듯 하앟게 만들었습니다.
손 뻗으면 닿을 듯 하던 개울 건너 밤나무집도 흐릿하게 윤곽만 보입니다.
오늘은 아이들 서넛이서 머루 따러 가기로 한 날인데 새벽 안개가 자욱하니 한낮의 날씨는 아주 좋을 게 틀림 없습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길섶의 풀잎에 매달렸던 이슬 방울이 마를 때 쯤,
동네 아이 서넛은 저마다 조그만 종다래끼 하나씩 옆구리에 차고 집을 나섭니다.
지난 말복에 잡아먹힐 뻔 했던 누렁이도 따라 나섭니다.
어디로 갈까, 딱히 정해 놓은 곳이 없기에 절골,산까치골,도라지골...골짜기 이름을 꼽아보며 바쁠것 없는 걸음 걷습니다.
마을 산쪽 끝 털보 영감네 집 울타리도 없는 마당에서 토닥 토닥 들깨 떨던 처녀가 아는 체 합니다.
"머루 따러 가니?
많이 따면 돌아갈 때 좀 주고 가라, 응?"
아이들은 헤벌쭉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이 가을 끝 무렵에 시집 간다는 처녀의 수건 쓴 얼굴이 뽀앟습니다.
마을을 뒤로 하고 묵은 화전밭을 지나갑니다.
작년에 콩을 심언던 화전밭에는 올해는 아무것도 심지 않고 묵어서 구절초며 쑥부쟁이, 억새만 무성합니다.
구절초 흰꽃과 쑥부쟁이 보랏꽃,노랑꽃이 무더기 무더기 흐드러졌습니다.
화전밭을 뒤로하고 산 속으로 이어진 실같은 오솔길을 따라 몇 걸음 들어서면,
그림책 다음 장 넘긴 듯, 갑자기 풍경이 바뀝니다.
나무마다 크레용 칠한 듯 노랗고 빨간 잎사귀를 달고 있습니다.
실바람 한 줄기 솨아 불면 나무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냅니다.
_ 너희들 왔구나.
머루 따러 왔니? 다래 따러 왔니?
조오기 조금만 더 가면 머루랑 다래랑 지천이란다.
가는 길에 가래도 좀 따 가렴...
떡갈나무,갈참나무, 상수리나무들이 빽빽한 숲 바닥에는 도토리가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도토리는 길쭉한 것, 동글동글한 것, 큰 것, 작은 것 저마다 다른 자태로 제가 떠나온 나무를 올려다보며 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도토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도토리는 어른들이나 주워서 이고 지고 오는 것이지 아이들 영역 밖입니다.
도토리 까먹던 다람쥐만 아이들 인기척에 짬깐 놀란 척하다가, 다시 까먹습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즈음, 단풍나무를 감고 올라간 머루 덩굴에 주저리 주저리
열린 머루 송이가 햇빛에 까맣게 반짝이는 게 보입니다.
우와! 환호하며 다려간 아이들은 손 닿는 대로 따 먹고, 덩굴에 매달려 따 먹습니다.
보기엔 한 없이 많을 듯 하던 머루 송이들이 새콤 달콤한 맛에 정신 없이 따 먹다 보니 손 닿는 데는 금세 없어집니다.
단풍나무를 감고 올라간 덩굴의 저 높은 곳에는 까만 머루 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어디한번 따봐라, 따봐라 하지만, 아이들 손 닿기에는 너무 높습니다.
먹을 게 어디 머루 뿐이랴, 아이들은 머루 덩굴을 뒤로하고 다래를 찾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다래도 덤불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서리 맞아서 거무죽죽하게 색이 변한 것은 보는 대로 입에 넣습니다.
서리맞은 다래는 입에서 그냥 녹아내리는 게 읍내에 가서 맛본 솜사탕 따위에 비길 수 없습니다.
아직 딱딱한 놈도 씨만 까맣다면, 따다가 아랫목에 묻어두면 하루 이틀만에 익습니다.
다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따 먹었지만 다래끼는 바닥에 머루 두어송이,
다래 열 댓알 굴러다닐 뿐 아직 비어있습니다.
머루도 다래도 보이기만 하고 딸 수는 없으니 갑자기 재미가 없어집니다.
재미가 없으니 슬슬 배도 고파집니다.
누구도 먼저 내려가자고 한 적이 없지만 아이들은 산을 내려 옵니다.
머루 다래가 그득해야 할 다래끼야 텅 비었어도, 아이들은 여전히 즐겁습니다.
화전밭가에 올라갈 땐 안보이던 돌배나무 한그루 눈에 띕니다.
주먹만한 돌배가 듬성 듬성 열려있습니다.
아이들이 나무 밑둥을 발로 차 보기도 하고, 돌 팔매질을 해보지만 돌배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닥을 살피던 아이가 저절로 떨어진 돌배 하나 주워 한 입 가득 베어 물다가
시고 떫은 맛에 얼굴을 찡그립니다. 에, 퉤퉤!
아이들은 허리에 빈 다래끼 덜렁거리며 마을로 내려옵니다.
저만치 털보 영감네 집이 보이는 곳에 길 옆 올망 졸망한 논배미는 벼베기가 끝나서 휑합니다.
구불 구불한 논둑에서 메뚜기들이 인기척에 놀라 후두둑 후두둑 뜁니다.
아이들은 메뚜기 사냥에 나섭니다.
메뚜기는 잡아서 소줏병에 넣어야 가지고 다니기 편하지만,소줏병이 없으면 강아지 풀 대궁에 꿰어서 들고 다니면 됩니다.
머루랑 다래가 가득해야할 다래끼에 메뚜기 두어 꿰미가 두어송이 머루랑 열 댓 알 다래 틈에 자리 잡습니다.
논둑에 이어있는 밭에는 아직 거두지 않은 콩이 있습니다.
"콩 서리 해 먹을까?"
누군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콩을 두어 포기 뽑아서 누구 보는 사람도 없건만 밭둑 움푹한 곳으로 냅다 뜁니다.
어른 몰래 가지고온 성냥이 나오고 서툰 솜씨로 불을 피웁니다.
둘러앉아 콩을 구워 먹어보지만, 서툰 솜씨에 제대로 익지 않아서 비리기만 합니다.
입 언저리며 콧잔등에 검댕이만 칠한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가리키며 깔깔댑니다.
아무래도 콩서리는 좀 더 큰 아아들 몫입니다.
이제 해가 설핏합니다
콩 구워 먹은 자리에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남은 불씨를 향해 오줌을 눕니다.
치지직 소리내며 불이 꺼지고 하얀 연기가 솟으면 아이들은 또다시 깔깔댑니다.
아이가 마당에 들어서니 언제 돌아왔는지 먼저 와있던 누렁이가 반깁니다.
빈 다래끼가 쑥쓰러운 아이는, 다래끼를 마루밑에 슬쩍 밀어넣습니다.
마루 위에는 큰 다래끼 가득 머루가 담겨있고, 작은 함지에는 다래가 수북합니다.
아이들은 온종일 쏘다녀도 빈 다래끼만 들고 왔지만,
어른들이 산자락 밭일 마치고 잠깐동안 따온 머루랑 다래가 마루위에서 아이들의 입을 기다립니다.
거둔 것은 없지만 산으로 들로 종일 쏘다녔으니 노곤하기가 운동회 날같습니다.
저녁을 먹은 둥 마는 둥 따끈한 아랫목에 누우면 기다렸다는 듯 잠이 쏟아집니다.
잠들락 말락하는 아이의 머리맡에서 귀뚜라미가 쓰르르 쓰르르 웁니다.
봉창의 창호지 찢어진 틈새로 한 줄기 달빛이 비집고 들어옵니다.
아이는 잠 들어도 귀뚜라미는 밤새 울거고, 가을은 깊어갑니다.
-----달빛받은 박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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