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식었던 아랫목 구들장이 다시 따뜻해 옵니다.
아버지가 여물 끓이느라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핀 겁니다.
잠이 깰 무렵 등허리가 기분좋게 따뜻해지면, 다시 기분 좋은 얕은 잠에 잦아듭니다.
그러나 구수하게 퍼지는 여물 끓이는 냄새에 잠은 슬쩍 달아납니다.
여물 냄새에 배 불뚝이 암소가 구유를 들이받는 소리가 들립니다.
암소는 곧 새끼를 낳을 겁니다.
소 먹으라는 여물 끓이는 냄새지만, 아이의 입에 군침이 돕니다.
일어날까 말까 망설이는데 싸리비로 마당 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문을 빼꼼히 열고 밖을 내다봅니다.
밤새 눈이 소복히 내렸습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습니다.
산이며 들, 물 마른 개울이 모두 하얗고, 세상 모습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해있습니다.
초가지붕은 하얀색 바가지를 엎어놓은듯 둥글고,장독들도 하얀 사발을 하나씩 덮어쓰고 있는듯 합니다.
아이는 괜히 맘이 급해져 후다닥 일어납니다.
서둘러 아침 밥을 먹는둥 마는둥하고, 얼른 고양이 세수하고는 검정고무신 꿰신고 밖으로 나섭니다.
눈이 오면 아이들만큼이나 좋아하는 게 강아지들이라서, 누렁이도 아이 뒤를 따라나섭니다.
듬성 듬성 있는 집들을 이어주는 길은 부지런한 어른들이 눈을 치웠지만,
아이와 누렁이가 달려보고 뜀박질하는 곳은 아직 아무도 발자국을 내지 않은 밭이나 논입니다.
아이는 흰 눈위에 벌렁 누워봅니다.
그 주위로 누렁이가 신이 나서 맴돕니다.
햇살이 퍼지면 눈 덮인 세상은 더욱 빛나고 눈부신 아이들 눈은 더욱 작아집니다.
눈 가늘게 뜬 아이들은 앞 뜰 논으로 몰려듭니다.
앞 뜰 논 중에서 제일 큰 논배미는 <슈이 이해> 영감네 논인데, 해마다 물을 담아 얼려 둡니다.
겨울 논에 물을 담아두면 봄에 논둑이 쉬이 무너지는 터라,
농부들은 겨울에는 논에 물을 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논만큼은 해마다 물을 대서 얼음판을 만들어 놓습니다.
<슈이 이해>는 혀 짧은 영감님이 농삿철 품앗이꾼들에게
"이 사람들아 술이 일하는거야, 술 먹고들 일해!"
하면서 농주를 권했는데, 그 말씀이 <슈이 이해>로 들려서 붙은 별호입니다.
영감님네 얼어붙은 논도 어른들이 눈을 치워 놓았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비료포대나 썰매를 탑니다.
구두가 붙은 스케이트를 갖고있는 아이는 동네에 이장네 아들하고 서울댁 손주뿐입니다.
나머지는 판자 밑에 철사를 붙이거나 대장간에서 만든 칼날을 붙인 썰매를 타고 꼬챙이로 얼음을 찍으면서 달립니다.
스케이트를 타던 이장네 아이도 곧 스케이트를 벗고 썰매를 탑니다.
논 밖의 비탈에서는 비료 포대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옵니다.
모닥불 피운 언저리에서 썰매를 타던아이는 그만 얼음이 깨져서 메기를 잡습니다.
메기잡은 아이는 얼굴이 벌개져서 젖은 발과 엉덩이를 모닥불에 들이댑니다.
나일론 양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더니 한쪽이 쭈구러집니다.
나일론 잠바에도 불똥이 튀어 구멍이 나고 구멍 주위가 쭈그러집니다.
화들짝 놀란 아이가 쭈그러진 잠바를 손으로 문지르며 울상을 짓습니다.
배가 고파진 아이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메기 잡은 아이도 집으로 돌아갑니다.
김이 모락모락나도록 발을 말렸는데도 고무신 속은 물이 질퍽거립니다.
잠바와 양말을 구워버린 아이는 양말을 후딱 벗어 마루 한끝에 밀어놓고 구렁이 담넘듯 방으로 들어갑니다.
아이의 잠바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아이의 언 손발을 주물러주고 아랫목에 깔아둔 이불속으로 아이를 밀어넣습니다.
눈구덩이와 얼음판을 뒹군 아이는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서 깜박 졸음이 쏟아져
꿀같은 낮잠을 한 숨 잡니다.
섣달 짧은 해가 서산에 잠깐 걸렸다가 눈 깜짝할 새 넘어가 버리면, 동네 청년들은 참새 사냥에 나섭니다.
청년들은 건전지 새로 끼운 손전등을 들고 초가지붕 처마밑을 뒤집니다.
눈 쌓인날 참새들은 초가지붕 이엉틈을 비집고 밤을 새우는데, 전등불을 비추면 도망도 못가고 눈 부신듯 눈만 껌벅거립니다.
키가 모자라서 청년들은 아이를 데리고 참새를 잡습니다.
아이는 청년의 무동을 타고 전등불로 비추어보고 이엉 틈새로 손을 넣습니다.
손아귀에 잡히는 참새의 따뜻하고 뭉클한 감촉에 아이는 오금이 저릿저릿합니다.
아이는 잡아낸 참새를 가랑이 아래 청년에게 건네주기가 싫습니다.
그냥 놓아주고 싶은데 청년이 재촉합니다.
"어른 줘! 꾸물대다가 구렁이가 손에 잡힐라."
실 없는 농담이지만 아이는 등줄기가 서늘합니다.
오래된 집에는 구렁이가 산다는데, 참새 잡다가 구렁이 움켜쥘까봐 겁이 납니다.
동지 섣달 긴긴 밤을 어떻게 잠으로만 보낼까,
방학한 아이들과 농삿일 없는 어른들 밤 마실은 늘 있는 일입니다.
방 넓고 군불 넉넉히 지핀 아이네 사랑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청년들은 화롯불에 참새를 구워 소주를 마시고, 아이들은 윷놀이를 합니다.
참새 굽던 청년이 아이에게 참새고기를 한 점 줍니다.
손아귀에서 꼼지락거리던 참새의 느낌이 아직 손바닥에 남아있는 아이는 도리질을 합니다.
청년은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넣고 지글대는 참새고기를 먹으며 말합니다.
"참새가 암소 잔등에 앉아서 네 고기 한근 보다 내고기 한점이 낫다고 한다더라,
이녀석아, 싫음 관둬라."
청년이 텃밭 무 구덩이에서 무를 꺼내다 줍니다.
텃밭에는 구덩이를 파고 무를 저장해 두는데, 겨울을 나도록 무는 얼지도 않고 싱싱합니다.
어두운 땅속에도 세월은 지나갔기에, 꺼내온 무에는 새싹이 조금씩 노랗게 돋아있습니다.
아이들은 둘러앉아서 무를 숟가락으로 긁어 먹습니다.
달고 시원한 맛이 비길데가 없습니다.
밤이 깊어 사람들은 달빛 받아 하얀 길을 따라 돌아갔습니다.
문 밖에 바람이 한 줄기 매섭게 불면 문풍지가 부르르 부르르 웁니다.
아이는 아랫목 이불속으로 파고듭니다.
밤이 깊어가고 겨울도 깊어갑니다.
그만큼 봄도 가까이 와 있습니다.
------ 달빛받은 박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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